급진적이고 강력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던 북인계열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이후 정권다툼은 남인과 서인으로 좁혀졌다. 그중에서도 우암송시열은 율곡 이이에서 사계 김장생을 거쳐 내려오는 서인의 정통 학맥을 이어온 인물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암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우암송시열은 율곡 이이를 정통으로 이어받아 조선성리학을 심화시키고 현실에 적용하여, 조선후기 영정조 문예부흥을 이루는 근간이 되게 하였던 사상가였다.
송시열을 둘러싼 논쟁은 아주 다양하다. 60년대 70년대에 평가한 조선후기의 모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나라가 피폐해졌는데
1. 들어가며
허목과 송시열은 1600년대의 조선이라는 같은 시기를 살며 라이벌 관계를 보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추구하는 학문적 색깔이 분명하였고 각자의 영역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허목은 동인에서 비롯된 남인 계열이었고 송시열은 서인에서 비롯된 노론 계열이었다. 이들이 보인
김집은 그의 문하에 있던 송시열을 추천 하였다. 1649년 기축봉사에서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에 부합하여 북벌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었고,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전할 것
2.예를 강구하여 상사에 애도의 뜻을 다할 것
3.학문에 힘써 마음을 바르게
Ⅱ. 사림의 계보
1. 이이-김장생-송시열
이이 - 김장생 - 송시열’을 연결한 것은, 이이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호서지역의 서인들은 김장생 -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이이 중심의 성리학 이해와 절의를 중심으로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를 중심으로 한 학파는 그와 동시대에 교류한 학
송시열의 저술 등으로 뒷받침 된다. 송시열은 주자의 본뜻에 충실함으로써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리학의 이론 논쟁은 호락논쟁으로 대표되는 심성론에 대한 관심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성리학의 교조화 현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탈성리학 경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1. 대전 지역개관
대전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한 분지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쪽에서 산지가 현저히 발달해 있는데 동쪽 방면은 동구 식장산 에서 부터 고봉산, 함각산, 개머리 산, 계족산 등의 줄기가 이어지며, 서북쪽으로는 금병산, 우산봉, 도덕봉, 백운봉 등 계룡산을 거쳐
1.우암송시열은 누구인가?
이름 : 송시열(宋時烈)
호 : 우암(尤庵)
출생 : 1607년 (선조 40)
사망 : 1689년 (숙종 15)
관직 : 문신출신으로 1658년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조판서의
직책을 맡았다.
-뇌물과 벼슬을 멀리하고 올바른 정치와 학문을 중요시 하였으며 그 당시에 수많은 문
고려 말엽까지 우리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글자를 가지지 못하였지 때문에 한자를 빌어 쓰거나 한시문 형태로 표기하였다. 조선 초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까지는 빌어 쓴 글과 한문 글이 공존하였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이후 나라글자가 실용화되기 시작한 이후의 조선
Ⅰ. 들어가며
병자호란 직후 북벌론은 대청관계에 주체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왕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는 효종대였다. 당시 효종이 북벌론을 국책으로 적극 추진한 이유는 인조반정에 의한 왕위계승에 정통성 결여라는 문제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위계승의 정